9/14 제3회 노동영화제 <레 미제라블(2019)> 발제
영화 제목이 “레 미제라블”인 이유?
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역작 <레 미제라블>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1830년 왕정이 복고되고 산업화로 빈부격차는 심화된 사회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비참한 자들’이라는 뜻의 제목이 보여주듯 절망적이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여러 인간군상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18세기 이후 유럽에서 과열되던 민중의 분노와 정의에 대한 시대적 요구를 집대성한 작품이라 평할 수 있다. 소설과 이를 영상화 한 2013년의 영화 <레 미제라블>은 장발장의 개과천선과 임종 이후 보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 프랑스 혁명이 지향했던 정의라는 가치의 의의나 그것이 실현된 세상을 보여주며 엔딩을 맞이한다.
우리가 지금 관람한 영화 <레 미제라블(2019)>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200년이 훌쩍 넘은 오늘날 프랑스의 몽페르메유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실제로 빅토르 위고가 머무르며 <레 미제라블>을 집필한 마을이기도 한 이곳에서 프랑스 대혁명이 지향하던 정의는 과연 실현되었는가? 여전히 민중들은 경찰로 대표되는 체제의 위협을 받으며 지속적으로 비참한 사회에 노출된다. 혁명이 제시하던 이상이 끝내 실현되지 않은 현실은 작중 경찰들의 농담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물론 200여년 전과 공통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 자본주의가 발전하여 시장의 규모가 전세계로 뻗어 나가 발생한 인종과 민족이 다른 이민자들이 프랑스에 정착하여 민중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의 대사나 행동을 통해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오늘날 프랑스 사회를 다룰 때 빠질 수 없는 “공화국(공화주의) 전통”이 사회적으로 정착된 모습 또한 200여년 전과의 또 다른 차이일 것이다.
프랑스의 ‘공화국 전통’과 질서, 그리고 폭력
본 영화는 소년 ‘이사’가 프랑스 삼색기를 두른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로 내걸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그 의미를 가지고 채택된 이 깃발은 프랑스의 ‘공화국 전통’을 상징한다. 혁명 시기 반혁명 동맹에 의해 프랑스가 전쟁의 위협에 빠지자, 민중들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봉건귀족들의 국가가 아닌 국민들 자신의 조국을 위해 군대에 입대했고, 그것이 근대국민국가의 징병제의 시초였다. 이후 여러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에는 공화제가 정착되었고, 공화제적 전통이나 질서는 근대국민국가로서의 프랑스를 떠받치는 기둥으로 성립하게 된다. 프랑스 공화국의 질서는 정교분리 원칙을 관철한다는 명목으로 무슬림 여학생의 교내 부르카 착용을 금하거나, 마크롱 정부가 과격해진 이민자 시위대에 “공화국 제도와 맞지 않는다”며 투항할 것을 요구하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즉, 모든 국가 질서가 그렇듯이 프랑스의 “공화국 전통”은 국가라는 폭력을 독점한 정치결사체의 분열을 저지하고 통합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이다. 봉건주의의 속박을 분쇄한 혁명의 결과물이었던 삼색기가 오늘날에는 또 다른 쇠사슬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영화는 몽페르메유 마을을 둘러싼 폭력과 그 폭력을 통해 유지되는 질서의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폭력들은 두가지 형태로 구분될 수 있다. 지역사회의 유지와 관련된 구조적 폭력과 개인에 의해 물리적으로 행해지는 폭력, 이 두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구조적 폭력의 대표적인 예로 경찰과 범죄조직 간의 위험한 동행을 들 수 있다. “시장”이라 불리는 인물의 조직은 상거래가 오가는 시장바닥의 자릿세를 받고 엘리베이터가 고장난 아파트 고층에 물건을 배달해주는 등 몽페르메유 지역사회의 실질적인 통제권을 확보하고 있다. 국가의 행정력이 온전히 미치지 않는 곳에서 그 공백은 범죄조직에게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백에서 질서가 꼭 야만적이고 노골적인 모습을 띄지는 않는다.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 무슬림 형제단의 생활 계도 활동은 종교를 통해 마을의 질서를 유지하는 부드러운 폭력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을 일대에서 그나마 구실하는 최소한의 국가의 행정력인 경찰들은 이 공백의 질서를 담당하는 이들과 불신이나 미묘한 긴장은 있지만 서로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한다. 법을 통해 폭력을 독점한 국가기관과 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민간집단의 공생은 마을이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구조 그 자체이다. 구조적 폭력의 경계를 몽페르메유 마을 너머 프랑스 전국으로 확장시키면, 통합된 프랑스라는 ‘국뽕’을 주입시키는 월드컵 또한 이데올로기로서 프랑스 공화국을 떠받치는 하나의 구조적 폭력이다.
두번째 종류인 개인에 의해 물리적으로 행해지는 폭력은 영화에서 수없이 많이 비춰진다. 경찰 중 특히 크리스 경관이 보여주는 행태가 그중 일부로, 불필요할 정도로 강압적으로 검문을 진행하며 수색영장 없이 가택진입을 시도하는 등 법이 정한 한계를 넘어 월권적인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그러나 크리스 경관의 폭력을 개인적인 일탈 정도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경관의 폭력은 항상 몽페르메유 마을의 질서 유지라는 명분이 뒷배로 작용하기에 가능한 일이며, 이는 그와다가 스테판에게 고무탄을 의도적으로 발포한 이유-“이렇게 안하면 잡아먹혀. 야간조 애들 봤지? 람보가 돼야 경찰 대접을 받아.”-를 설명하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집시 서커스단의 단장이 경찰에게 잡혀 온 이사를 사자 우리에 넣고 위협하기 전에 있는 도둑질에 관한 짧은 설교 또한 질서와 폭력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구조적 폭력은 개인의 일탈적 폭력의 배경으로 작용하며, 그 자체로도 폭력이지만 또 다른 폭력을 재생산하는 기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거꾸로 뒤집힌 ‘레 미제라블’
영화는 소설 <레 미제라블>의 한 문단을 인용하며 끝을 맺는다. “여러분 이걸 잘 기억해 두십시오. 세상에는 나쁜 풀도 나쁜 사람도 없소. 다만 나쁜 농부가 있을 뿐이오”. 소설에서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를 만나고 개과천선한 이후, 제대로 수확되지 못하고 버려지는 쐐기풀들을 보는 대목에서 나온 문장이다. 쐐기풀은 성공적으로 수확하기 어려워 농부들에게 잡초와 같은 취급을 받는 작물이지만, 수확에만 성공한다면 굶주린 사람의 배를 채우거나 직물의 원료가 되거나 가축의 먹이가 되는 등 쓰임새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게 열려 있다.
소설의 문단은 제쳐 두고,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영화 <레 미제라블>은 “거꾸로 뒤집힌 소설 <레 미제라블>”이라고 평할 수 있다. 소설에서 미리엘 주교와 같은 성직자는 장발장이 회개하고 정의로 나아가게 만들며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킨 인물이다. 소설에서 결정적이었던 성직자의 역할은 영화에 와서는 영향력은 있어도 폭력의 굴레 앞에 결정적인 변화를 만들지는 못하는 살라라는 무기력한 무슬림으로 표현된다. 장발장, 마리우스, 코제트 등 다양한 인물들의 각 개인사에서 이들이 얽히고 설켜 하나의 군중을 이루는 혁명의 장면으로 나아가는 소설의 연출과 정반대로, 영화에서는 월드컵을 통해 하나가 된 몽페르메유 마을 주민들의 모습을 보여준 뒤 각 개인을 조명하고 새끼사자 실종 사건으로 이들이 다시 뭉치게 되는 구성을 가진다. 이렇듯 영화는 소설의 구성이나 장치를 조금씩 비틀어 소설이 거꾸로 뒤집힌 영화의 모습을 연출한다.
나쁜 농부만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핵심적으로 영화가 소설을 뒤집은 구석은 주제의식과 이에 대한 접근법에 있다. 소설이 꼬집었던 비참한 사회의 모습은 다른 형태로 같은 문제를 안고 되풀이되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이 구가하여 외치던 정의라는 가치는 현대에 와서 또 다른 속박으로 작용하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은 분명 유럽의 봉건주의를 몰락시키고 민주주의의 확대를 불러왔지만, 여전히 사회는 폭력 속에 신음하고 민중들은 분노하고 있다. 공통된 주제의식을 다루지만 소설과 영화가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소설에서는 장발장, 코제트, 봉기하는 청년들, 자베르 등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각자가 바라는 정의관을 보여주고, 장발장의 회개하고 남을 돕는 인생을 통해 정의의 가치를 역설한다. 반면 영화에서는 선과 정의 같은 거창한 대의명분이 드러나지 않는다. 마을을 돌아가게 만드는 거대한 구조와 이를 둘러싼 유혈낭자한 폭력만 있을 뿐이다. 세상에 나쁜 사람이나 나쁜 풀은 없다. 영화 속 인물들은 개인의 성격이나 태도에 차이점은 있을지라도 거대한 폭력 앞에서 변화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구조적 폭력이라는 나쁜 농부 앞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도덕이나 동기 따위와는 무관하게 무기력한 채 썰려 나가는 쐐기풀에 불과하다.
살라와 스테판의 대화 장면을 통해 상징되는 “분노를 표현해야만 들어준다면 어쩔텐가”라는 프랑스 이민자 사회의 포효와 “2005년의 분노가 무슨 소용이 있었어? 차를 태우고 정류장을 부숴서 뭐가 남았지?”라는 저항에 대한 회의는 폭력의 굴레에서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를 묻는다. 어떤 선택을 하든 폭력의 굴레는 지속된다. 살라의 대사는 거대한 구조적 폭력을 단죄할 새로운 폭력을 주문하고 있고, 스테판의 대사는 폭동이라는 대중적 규모의 폭력을 예방하고자 민중에게 끊임없이 가해지는 폭력의 굴레를 용인하자고 말하고 있다. 스테판이 주체적으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조금 더 ‘신사다운 태도’로 폭력적인 검문을 진행하거나 상황이 급박해 선을 넘은 폭력이 발생했을 때, “정말 의도치 않게 고무탄이 나간거야. 실수였어, 믿어줘”라는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 없다. 2005년 프랑스 교외에서 경찰로부터 도주하던 이민자 소년들이 전기 담장을 넘다 사망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던 소요사태가 있었고, 2023년에도 알제리계 소년이 경찰의 교통검문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총으로 사살되며 발생한 비슷한 소요사태가 있었다. 오늘날 사회가 소년 이사의 마지막 선택이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행동이 될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폭력의 굴레의 일환에 불과하게 될지 그 가능성은 열려 있다. 연출적으로 비쳐지지는 않지만, 소년을 총으로 조준하고 있는 스테판 경관의 선택도 이사의 선택만큼이나 중요하다. 어떤 경우에도 이사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은 화염병 이상의 쐐기풀이었음은 명확하다.